터보테크 사태 잘 수습돼가나

[이데일리 이진우기자] 지난 9일 오전 7시 30분, 아침잠이 많은 투자자라면 아직 잠에서 깨기도 전인 이른 시각 증권선물거래소는 터보테크(032420)에 대해 2004년도 분식회계설의 사실여부를 묻는 조회공시를 요구하고 터보테크 주식의 거래를 정지시켰다. 2004년도 사업보고서가 나온지 5개월이 넘은 시점에 뜬금없이 불거진 분식회계설로 투자자들은 어리둥절케했다.

그로부터 6일이 흘렀지만 사태의 추이는 오리무중이다. 터보테크는 지난 9일 오후 "분식회계설의 사실여부를 확인중이며 추후 재공시하겠다"는 시인도 부인도 아닌 애매한 답변을 내놓고는 묵묵부답이다.




장흥순 터보테크 회장은 벤처기업협회장직을 내놨고, 금감원도 터보테크의 재무제표를 꼼꼼히 뒤져서 잘못된 점을 조사하는 이른바 특별감리를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만 내놨을 뿐이다.

◇분식회계 실체는 무엇인가



초미의 관심사인 분식회계의 여부는 아직도 짐작수준이다. 또 분식회계가 이뤄졌다면 어떤 방법이었는 지, 주식거래는 언제 재개되는지, 소문대로 700억원대의 분식회계가 맞다면 그 돈은 어디로 간 것인지, 혹시 이번 사건으로 회사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닌지등 숱한 의문은 그 어느 것 하나 속시원하게 밝혀진 게 없다.



터보테크의 분식회계는 지난달 양도성예금증서(CD)의 분실이나 편법유통 등이 문제가 되면서 실태점검에 나선 금융감독원의 조사과정에서 터보테크의 CD문제가 불거진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이 실시한 양도성예금증서 예치현황 일제점검 과정에서 터보테크가 보유자산으로 신고한 700억원 규모의 CD가 실제로는 터보테크가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금감원이 증권선물거래소에 이 사실을 통보했고 증권선물거래소는 터보테크에 조회공시를 요구한 것.



두 감독기관 모두 구체적인 분식 회계수법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발표를 하고 있지 않지만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700억원 규모의 양도성예금증서를 통한 금융자산 부풀리기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터보테크 본사 전경



'3자 명의 양도성예금증서 발행'이라는 용어로 알려진 이 수법은 비교적 간단하고 널리 이용되는 방식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모든 상장기업은 매년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를 받는다. 재무제표에 있다고 기록된 돈이 정말 있는지 실제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실적을 부풀린 업체나 회사 돈을 말못할 곳으로 빼돌린 업체들은 장부에는 있다고 기록된 돈이 실제로는 없는 경우가 많다.



이익이 나지 않은 거래에서 이익이 났다고 장부에 거짓으로 기록했거나, 회사 금고에 넣어둔 돈을 고위임원이 횡령했을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회사들은 증권사나 사채업자들과 짜고 장부 잔고를 맞추는 데 필요한 돈을 '30분 정도' 빌리기로 한다. 만약 장부에서 100억원이 비어서 맞춰 넣어야 하는 A업체가 있다고 치자. 전주(錢主)는 은행 문앞으로 A회사 관계자와 같이 가서 준비한 수표를 건네주고 회사 관계자는 그 수표로 은행에서 양도성예금증서(CD) 100억원어치를 산다.



이 CD에는 금액만 적혀있을 뿐 소유자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부피가 적게 나가는 현금과 마찬가지다.



A회사 관계자는 은행에서 자기 회사이름이 적힌 100억원의 양도성예금증서 발행사실 확인서도 함께 발급받는다. 회계감사를 나온 회계사들이 CD의 위조여부를 의심해서 확인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A회사 관계자는 은행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주(錢主)나 그 심부름꾼에게 100억원어치 CD 실물을 다시 건네준다. 30분간의 대출이 마무리되는 셈이다.



A회사는 회계감사를 받을 때 이 CD발행사실 확인서를 보여주면서 회사에 100억원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회계사가 CD원본을 보자고 하면 돈을 빌렸던 전주에게 연락해서 CD 실물을 잠시 빌려서 보여주고 다시 돌려주면 그만이다. 전주와 업체간의 신뢰관계가 깊다면 굳이 은행문 앞에서 기다리는 장면은 연출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비슷하다.



한 공인회계사는 "가끔 회계감사를 나가면 회사돈을 CD형태로 보관하고 있는 회사가 있다"며 "배경이 미심쩍기는 하지만 회사가 자금운용을 어떻게 하는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어서 CD발행확인서나 실물을 확인하고 넘어간다"고 말했다.



이런 관행을 터보테크에 적용하면 터보테크가 그동안 이익을 부풀려서 회계장부를 조작해왔거나 회사돈 700억원 가량을 용처를 밝힐 수 없는 곳에 사용한 후 700억원어치의 CD를 활용해서 잔고를 맞춘 것으로 보여진다.



터보테크 측은 이에 대해 아직 공식적인 시인이나 부인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단 회사를 살리는 것이 먼저이며 나중에 상황을 봐서 전후사정을 해명하겠다"고만 밝히고 있는데 분식회계설을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볼때 사실상 분식회계 자체는 시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감독당국에 의해 확인된 것은 터보테크의 자산으로 보도된 700억원어치의 CD를 현재 터보테크가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뿐이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CD 분실이나 대주주 횡령, 분식회계 등 여러가지로 가정할 수 있지만 감독당국은 실적과 재무상황을 부풀리기 위한 분식회계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증권선물거래소가 '분식회계설'로 조회공시를 요구한 것도 정황상 분식회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분식회계의 경우 이익을 늘이거나 손실을 줄이는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매출채권이나 재고자산을 부풀리는 경우는 있지만 현금자산을 부풀리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분식회계보다는 횡령 가능성에 무게를 둔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



700억원이 회사에 있어야 할 돈인데 없다면 누군가 횡령한 것이지만 700억원이 실제로는 없는 돈인데 장부상에만 있는 것으로 꾸민 것이라면 그동안 터보테크가 발표한 실적이 모두 거짓이라는 말이 된다.



터보테크의 회계감사를 맡은 인덕회계법인 관계자는 "아직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며 "일반적으로 회계감사 과정에서 회계사가 CD의 발행확인서나 실물을 확인했겠지만 회사에서 계획적으로 속이는 경우는 적발해낼 방법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터보테크 관계자는 "이번 일이 대주주의 횡령같은 비도덕적인 사건은 아닌 것으로 안다"며 "그동안 주가가 하락하는 과정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것이며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터보테크 앞으로 어떻게 되나



분식회계를 했다고 그 사실 자체만으로 코스닥에서 퇴출되거나 회사가 문을 닫지는 않는다. 올해들어 분식회계 사실을 고백한 대한항공과 두산산업개발 등이 별 문제 없이 영업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분식회계 사실이 회사의 평판이나 영업활동에 영향을 줄 경우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터보테크의 경우 영업활동으로 인한 현금유입이 부진한 상황에서 금융권 부채의 상환요구가 밀려들 경우 부도 등 최악의 상황도 예상할 수 있다.



터보테크가 지난해 말 감사보고서에서 현금과 금융상품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한 금액은 949억원이다. 이중 215억원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서 담보로 제공한 것이어서 대출을 값기 전에는 인출해서 쓸 수 없는 돈이다. 결국 터보테크는 지난해말 현재 734억원의 유동성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중에서 700억원이 '실제로는 없는 돈'이다.



이같은 상황은 지난 8월 제출된 터보테크의 상반기 반기검토보고서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6월말 현재 터보테크의 현금과 금융상품 보유금액은 962억원, 이중 239억원이 금융권에 담보로 제공된 금액이다. 상반기말 기준 터보테크의 가용 유동성은 723억원(962억원-239억원)이지만 이중 700억원이 '갖고 있지 않은 CD'로 허위 계상된 부분이라면 터보테크의 유동성은 20억원 남짓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회사측이 '사태의 해명보다 회사를 살리는 게 우선'이라고 밝힌 부분도 이같은 위기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이 검토중인 터보테크에 대한 특별감리도 변수 중 하나다. 금감원은 터보테크가 분식회계설에 대한 답변을 해오는 대로 특별감리를 진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서 이 과정에서 추가적인 회계부정이 발견될 가능성도 남아있다.



현재 거래정지중인 터보테크 주식은 터보테크가 분식회계설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할때까지 거래정지 상태가 계속된다. 일부 투자자들은 분식회계 여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현 경영진이 분식회계 여부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미루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금융자산을 부풀린 분식회계라면 분식회계의 주체인 경영진이 정확한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데 '사실 여부를 확인중'이라는 식의 공시만 제출하고 일주일째 입을 닫고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일각에서는 벤처업계 전반에 미칠 파장을 우려한 금융당국이 발표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실제로 터보테크 측은 이번 사건이 발생한 후 해명 보도자료를 준비했으나 이를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정황으로 볼 때 해명 자료를 준비할만큼 상황파악은 모두 끝난 상황이지만 뭔가 더 고려할 것이 남아있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불거지는 상황이다.



코스닥시장본부 관계자는 "지난해 11월에도 코스닥 업체 아이메카가 분식회계설에 대한 조회공시 요구에 17일만에 답변한 전례가 있다"며 "곧 터보테크 측이 답변을 할 계획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벤처업계 뒷수습에 잰걸음



이번 사건이 벤처업계의 간판인 장 회장이 연루된 사건이라는 점은 사태의 파장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 장 회장은 이민화 전 메디슨 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지난 2000년 2월부터 벤처기업협회 회장을 맡아오면서 벤처기업 헌장을 발표하고 벤처기업 윤리경영 확산 사업도 주도해 왔다.



특히 지난해 벤처 패자 부활제 등 `벤처활성화 10대 아젠다`를 제안, 지난 연말 정부가 `벤처기업 활성화 대책`을 내놓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장 회장이 분식회계 문제로 사법처리될 경우 그동안 추진해온 벤처 활성화 대책도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장 회장이 내놓은 벤처 패자부활 제도에 대해 부도덕한 기업인에게 면죄부와 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해 왔는데 이번 사건으로 벤처기업인들의 도덕성 문제가 다시 도마위에 오를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같은 우려를 반영한 듯 벤처기업협회는 이번 사건이 터지자마자 "장 회장과는 일체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며 분식회계는 장회장의 터보테크와 관련된 사안일 뿐"이라고 터보테크 사태가 다른 벤처기업으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 회장과 터보테크가 각각 19%, 13%씩의 지분을 갖고 있는 코스닥 상장사 넥스트인스트루먼트는 터보테크 사태의 불똥을 가장 가까이에서 맞게 되는 업체다. 넥스트인스트루먼트가 터보테크의 분식회계설에 개입됐다는 정황은 없지만 장흥순 회장과 터보테크 측이 금융권의 채무 상환 압박을 받게 될 경우 보유지분을 처분하거나 담보로 맡기게 될 가능성은 남아있다.



LG카드 사태에 휘말려 채권단에 처분권이 넘어간 LG투자증권이나 SK글로벌 사태 당시 워커힐호텔의 상황과 비슷한 입장에 처한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터보테크의 분식회계설로 가장 마음을 졸이는 쪽은 비슷한 사정의 코스닥 업체들이다. '믿었던 터보테크가 분식회계를 했다니 놀랍다'는 선에서 사태가 마무리되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터보테크만 이렇겠느냐'는 의구심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코스닥 기업의 한 관계자는 "실제로 양도성예금증서의 무기명성을 악용한 자산 부풀리기는 업계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일로 알고 있다"며 "회계감사때가 되면 오토바이로 CD를 배달해주는 사채업자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퇴출위기에 몰렸던 코스닥 업체들 중 일부도 CD를 이용해 회계감사를 받았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영업규모에 비해 현금성 단기금융상품이 지나치게 많았던 업체들을 대상으로 특별감리에 착수할 경우 분식회계 문제가 벤처 업계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이에따라 벤처업계는 벤처기업협회(KOVA)를 중심으로 공동 대응에 발빠르게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KOVA는 회장 교체와 함께 대국민 사과와 투명경영 성명까지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테보테크의 분식은 장 회장이 어려운 후배 벤처기업들을 돕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이뤄졌다는 입소문이 나돌고 있어 금감원의 최종 판단이 주목된다. 또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장 회장에 대한 동정론은 벤처업계의 결속력을 다지는 촉매로도 작용해 터보테크의 미래에도 적잖은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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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voice@edaily.co.kr